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에 있는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운현궁은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즉 운현이란 서운관의 약칭이다. 고종이 즉위한 뒤 운현궁으로 부르게 된 것은 왕의 잠저시의 거처를 본궁이라고 하는 선례와 ‘운현’이라는 지명에 유래하여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도록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 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과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서 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정 공방이 있었으나 그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현재 운현궁 영역에 남아 있는 주요 건물들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 있으며, 지금은 소유가 바뀌어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김승헌가 역시 큰아들 이재면 부부가 거처하던 영로당으로 운현궁의 일부였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 만에(1864.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때 고종은 자신이 그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경근문, 공근문, 정문, 후문)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 TBC 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 원년(1864년)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고종 6년(1869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에는 4개(경근문, 공근문, 정문, 후문)의 대문이 있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 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 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성이 다른 일가)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노락당 못지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사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사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 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공근문은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구)일본문화원 옆 터에 그 기초만 남아 있다.
대원군의 정치 생애와 운현궁의 성쇠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운현궁의 역사적 보존 가치는 대원군이 한국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과도 같았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인 노락당, 노안당이 사대문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그 모습이 엄숙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운현궁의 중심건물인 노락당은 낙성식 때 고종과 대왕대비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가례를 치른 곳으로써 이 건물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대원군이 하야한 이후 운현궁도 점차 위용을 잃었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청에 구금당하고 있는 동안에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관리유지가 힘들었다. 다시 운현궁이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그가 재집권하고서부터이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한 것은 2차례 있었다. 처음은 임오군란 직후 33일간(1882.7.23. - 8.26.)이었고, 두 번째는 동학혁명 당시로서 약 4개월간(1894.7.23. - 11.22.)이었다. 이 경우 대원군의 재집권 배경과 계기는 서로 다른 점이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2차례 모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초기 집권할 때부터 내정개혁에서 역점을 두었던 인사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신분에 관계없이 불만 세력을 포용하는 인재 등용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 당시의 대원군은 이미 지방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씨 정부나 청·일 측이 동학군의 봉기를 폭동으로 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사회변혁 운동으로 규정하는 한편 서울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전개될 것이라는 암시를 할 정도로 동학군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재집권은 민씨 정부를 돌려놓고 조선의 내정개혁을 독자적으로 강행하려던 일본 측 전략과 대원군의 집권 의지가 상호 연계되어 가능했다. 대중적 지지기반은 그가 재집권한 후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재집권할 당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오군란 수습조건으로 일본이 부당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을 때, 또 조선 정부가 양보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중재한 청에 대해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강온양면 정책이었다. 일본의 무례한 요구에 대하여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책을 썼는가 하면 한편으로 시일을 지체하면서 청과의 협조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도 구사했다. 그렇다고 해서청의 중재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이때의 대외정책은 겉으로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아직 경직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대외정책이 명분보다 실용주의 방향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 당시 재집권할 때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대원군이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과의 협조를 꾀했다. 교전 중이던 청이나 내정개혁을 강요받던 조선 측 입장에서 보면 상부상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을 국제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그는 이미 청과 일본이 출병했을 때 러시아의 개입을 예견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조선지배 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러시아 측과 접촉하여 러시아를 통한 일본견제를 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는 은밀히 청·일을 중재하고 있었고 3국 협동론을 제시하여 조선에 관여할 의사를 비쳤었다. 별로 소득이 없었지만 대원군은 러시아 외에도 영국이나 미국과도 외교접촉을 시도하였다. 영국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역시 드러나지 않게 중재를 시작했는데 이때의 중재안은 청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조선주재 각국 공사들과의 면담을 통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해 보았지만, 민씨 정부의 무능과 타락이 한계에 이른 상태에서 조선 정부에 대한 국제적 협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대원군은 이 점을 알았기 때문에 친일 개화파 인물 제거와 신정부 수립을 계획하였으나 이른바 이준용 역모 사건으로 인하여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