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안내

왕실 문화의 전당, 운현궁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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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인물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1820년 ~ 1898년)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시호는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면(載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 되었다.


여흥부대부인 민씨 (1818년 ~ 1898년)

조선의 왕족.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어머니.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일찍이 가톨릭을 믿어 일과문(日課文)을 읽었다. 1863년 둘째 아들 재황이 임금이 되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다 하며, 1863년 12월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이 고종비(妃)를 간택할 때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다. 민치록 역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가까운 친척이 드문 점을 감안하였으나 뒷날 자신의 친동생인 민겸호를 양자로 들이게 되면서 사태는 달라졌다.

천주교 신자인 민씨는 1887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자, 1896년 10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에 여흥부대부인에 봉작되었다. 고종의 유모이며 같은 교우인 박(朴)마르타와 함께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로 추봉 되었다.


고종

고종 (1852년 ~ 1919년)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 자 성림(聖臨). 호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다. 비(妃)는 명성황후로,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통상수교거부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민겸호(閔謙鎬)·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미, 한·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洪範十四條)〉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遼東領有]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種痘)·우체사무·단발령·양력사용·도형폐지(徒刑廢止)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정병하(鄭秉夏)·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 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제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였다.

당시 고종의 사망을 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퍼졌다. 그날 고종의 병세가 위중하여 이완용이 궁에 머물며 숙직을 하였으며 궁전의 나인을 시켜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는데 식혜를 마신 후 복통으로 급서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일제는 《매일신보》에 기사를 내고 고종이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던 나인 2명도 잇따라 사망했는데 고종 승하 후 이틀 뒤 23일에 나인 김씨가 감기로 급사하고, 2월 2일에는 나인 박씨가 심한 기침으로 사망했다. 고종의 사망으로 항일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인산일)에 맞추어 3.1운동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운현궁

명성황후 (1851년 ~ 1895년)

조선 말기 제26대 왕 고종의 비(妃), 고종의 황제 즉위 이후 명성황후라 칭해짐.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민씨 일가에 재주가 비상한 아이로 알려졌다. 1866년(조선 고종 3년) 외척 세도정치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고종비의 물색에 골몰하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궁녀 이씨를 총애하고 명성황후를 돌보지 않았으나 예의범절이 밝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궁녀 이씨가 서자 완화궁(完化宮)을 낳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단히 기뻐함을 보자 명성황후는 불만과 질투로 정치적인 수완을 부리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으로 명성황후에게는 일반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 기회로, 대원군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한편 1874년(조선 고종 11년)에 왕자 척(拓)을 낳았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척족 일파가 득세하여 집권하려는 낌새를 눈치 챈 흥선대원군은 완화궁을 장자로 하여 태자(太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분개한 명성황후는 드디어 흥선대원군과의 경쟁을 시작, 원로(元老)인 이유원(李裕元)을 북경에 보내어 왕자 척(拓)을 정자(正子)로 승인받고, 흥선대원군의 내치가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민승호(閔升鎬)를 시켜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와 결탁하고,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쁜 김병국(金炳國)일파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장자 이재면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은 물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등과 연결을 맺고 명성후 중심의 세력을 만들어 갔다.

드디어 1873년(조선 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매, 고종은 대외 개방주의를 내세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안으로는 흥선대원군 내치를 시정해 나갔다. 명성황후 중심의 일족들이 궁내의 요직을 차지하여 흥선대원군과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더니 1882년 임오년에 군란이 일어나 명성후는 간신히 충주목 민은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있으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고 명성황후가 죽은 것으로 오인하여 명성황후의 장례식까지 치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갔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세력을 잃게 되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매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로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이러한 친로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1895년 10월 8일 친일파와 일본공사가 보낸 20~30명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마저 비단이불에 싸 석유를 끼얹어 불질러버렸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명성황후로 추책 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경복궁 깊숙한 곳 구 민속박물관(한동안 전승공예관으로도 사용)오른편에 명성황후 조난비가 외로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운현궁의 주인들

1대이하응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순조 20년∼고종 35년)

2대이재면 (1845년 ~ 1912년)

완흥군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로 동생 명복보다 7살이 위였으나 왕세자로 간택되지 못하였다. 그는 상처하여 57세에 20세인 계실 이씨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아래였다.

3대이준용 (1870년 ~ 1917년)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로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연마한 후 12년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준용의 뒤를 이을 혈육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운현궁의 내당 살림살이는 이재면의 부인 이씨(1883~1978)가 맡았어야 하는데 한 세대를 건너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인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가 내당살림을 맡게 되었다.

4대이우 (1912년 ~ 1945년)

흥영군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갈 때 나이가 5세이었다. 10세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니 이준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나 이우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의 정략적인 음모술책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우와 결혼한 박찬주(1914~1995)는 박영효의 손녀딸이다.

5대이청 (1936년 ~ )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 되는데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자란 이청은 어린 시절을 운현궁에서 살지 않았으며 가끔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왔을 때 운현궁에서 지냈을 뿐이다. 이청씨가 운현궁의 소유(관리)로 된 것은 1948년부터이다. 운현궁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